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문단 편집) == 사망자 명단 == * 대한민국(17명)[* 10월 13일 합동 [[국가장|국민장]]으로 전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서석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여담으로, 서석준 부총리의 외동딸인 서이영은 12년 뒤인 1995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범석(1925)|이범석]](외무부장관), [[김동휘]](상공부장관), [[서상철]](동력자원부장관), [[함병춘]](대통령비서실장)[* 3대 부통령을 지냈던 [[함태영]]의 막내아들이다.], 이계철(주 미얀마 특명전권대사), [[김재익]]([[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재무부차관)[* 사건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으나 부상자들이 후송된 미얀마 제2육군병원의 의료상태가 소독 약품이 모자라 물로만 상처를 씻고 가위도 없어 붕대를 면도칼로 자를 정도로 열악한 탓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4일만에 숨지고 말았다.], 강인희(농림수산부차관), [[김용한(1929)|김용한]](과학기술처차관), [[심상우]](국회의원,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전 호남전기 및 전남매일신문 사장, [[광주일보]] 명예회장.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 [[민병석(의사)|민병석]](대통령 주치의), 이재관(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관), 이중현([[동아일보]] 사진기자)[* 이 사건으로 사망한 유일한 언론인이다. 1949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난 [[실향민]]으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과를 나왔으며 경향신문과 조선일보를 거쳐, 1973년에 동아일보로 이직했다. 1968년 제16회 국전 사진전 입선을 비롯해, 한국국제사진살롱 등 각종 보도사진전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1970~80년대 초까지 걸작급 보도사진들을 남긴 거장이기도 하며 대표적으로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의 참상을 다룬 <11월 11일의 일기>, 1978년 동아일보 컬러사진 1호 <하늘을 보다> 등을 남겼고 1983년에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항목에 실린 '33년만에 만난 오누이의 절규' 사진을 찍은 기자가 바로 이 분이다.([[http://dongne.donga.com/2018/12/26/80-%EB%8F%99%EC%95%84%EC%9D%BC%EB%B3%B4-%EC%82%AC%EB%9E%8C%EB%93%A4-%EC%9D%B4%EC%A4%91%ED%98%84/|상세 정보]])], 정태진, 한경희(대통령경호실 경호관) * 미얀마(7명): 4명(+3명, [[테러리스트]] 검거작전 중 순직자) * 북한(1명): 공작원은 총 3명이었는데 신기철 상위는 체포 과정에서 사살되었고 2명은 체포되었다. 자국 국가원수 및 우방국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을 시도할 경우 사형에 처해지는 미얀마의 [[형법]]에 의거해 김진수 [[소좌]]는 1984년 [[사형]]이 집행되었고[* 여행 안내서에 따르면 김진수 소좌는 당시 부상이 매우 심각해 고통을 줄여 주려던 인도적 차원에 맞춰 사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강민철 상위는 수사에 협조한 점을 참작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5년간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2008년 5월 18일에 중증 간질환으로 옥사했다. 강민철 상위의 이름은 후일 [[미국]]에서 나온 [[6.25 전쟁]] 관련 소설에서 스파이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1989년부터 강씨와 같이 수감되었다가 2008년에 출옥한 미얀마 야당 정치인이자 언론인의 증언에 의하면 강씨는 생전에 한국으로 가고 싶어했다고 한다. 2007년 말 북한-미얀마 간의 외교가 수복되자 기대를 가졌지만 '''[[토사구팽|북한은 강씨가 자국민이 아니라며]]''' 송환을 거부했고 남한은 극악한 테러범이라는 이유로 송환을 거부해서 결국 미얀마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북한의 공식 입장은 당시나 지금이나 "독재자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제거하려던 남조선 인민 스스로의 의거이지 북한이 개입한 게 아니다"고 따라서 "강민철은 공화국의 인민이 아니라 대한민국 인민"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1.21 사태]]를 비롯하여 1960년대에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잠입할 때마다 북한에서 상투적으로 내세운 핑계이다. 자신들이 보낸 간첩이 아니라 남조선 인민들이 파쑈 도당에 반대해서 궐기한 것이라고 책임도 회피하고 동시에 남한 혁명을 지원해야 한다는 구실로 삼는 것. [[베트남 전쟁]] 때도 비슷하게 돌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